내인생의 전환점 3
상주 모동면 한 포도 농장에 둥지를 틀고 난 뒤, 아내는 십년의 기다림 끝에 인도로 여행을 떠났다.
산청에 자리잡고 있는 간디중학교에 다니고 있던 아들은 나름대로 즐거운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다.
덩그마니 혼자 남겨진 나는, 농장주와 함께 수확이 끝난 포도밭 뒷정리와 수확한 포도의 포장, 발송등 주어진 일을 하며 초보 농꾼으로서의 첫 걸음을 시작했다.
한달여의 농장일이 마무리 되고나니
상주는 이미 겨울로 들어섰다.
어느 날, 귀농학교 동기들과 괴산에 있는 솔뫼농장을 둘러보러 갔다가 혼자서 2년에 걸쳐 집을 지어 살고있는 한 귀농인의 집을 방문하였다.
이미 방송에 한 번 소개된 적이 있어
늘 손님치레를 한다는 그와의 만남은
이후 겨울내내 이어졌다.
찾아오는 손님들과의 대화를 통해 시골살이를 간접경험하면서...
여러모로 의기투합되었던 우리가
함께 구상하고 시도했던 것은 '산골 작은 음악회'였다.
마을에서 떨어져 산속에 조용히 들어앉은 '그의 집 마당에서,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소담스럽게 음악회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뜻을 같이한 몇몇 벗들과 함께 차근차근 준비해나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2년 3월.
아직 눈발이 흩날리는 겨울 끝자락.
넓지않은 마당에 무대와 객석이 만들어지고
모닥불이 피어올랐다.
이렇게 관객을 포함한 50여명이 모여
함께 만들고 같이 즐겼던 작은 음악회는
초등학교 학예회처럼, 모두에게 소박한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 이후 두번째에는 100여명이,세번째에는 삼백여명이 참여하면서 너무 큰 음악회가 되어버렸지만...)
청년시절, 노래가 좋아 노래모임을 하며
노래를 통해 세상을 변화시키는데 일조하고있다고 스스로 위로하던 때가 있었다.
그이후, 결혼하고 노래모임은 그만두었지만
노래는 내삶의 여정에 늘 함께 했던 동반자였다.
대도시를 떠나 시골에서의 삶을 꾸리면서,
작은 음악회는 어쩌면 내가 하고픈 일 중 가장 즐거운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왜냐하면 내가 관심있었던 것이
아마츄어들의 반란이라고나 할까, 우리 소시민들이 전문 연예인들이 모두 점령해버린 연희 공간에서 그들이 화려하게 보여주는 공연문화의 소비자로서만이 아니라, 부족한대로 함께 어울리며 스스로 즐기는 문화주체가 되는 길을 찾는 것 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내가 꿈꿔온 진정한 민중 문화의 모습이었다.
작은 음악회라는 형식은 그 꿈의 작은 실현이었다.
비록 그 시도는 몇 번의 실험으로 끝났지만, 현재까지 유효하다.
이후 농사를 접고 건축을 하게되면서, 전국을 돌아다니며 집을 짓는 곳에서 상량식이나 입주기념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했다.
지금의 노래모임 ' 노래하나 햇볕한줌'도 이러한 시도의 연속선상에 있다.
그저 노래가 좋아, 함께 모여 함께 노래하며 삶을 나누고, 그것을 이웃과 격식없이 나누는 이 모임의 꿈은 '문화자립'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2013 년 봄부터 6명으로 시작한 이 모임은 일년만에 세명의 멤버교체가 있긴 했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모여 잘 알려지지 않은 좋은노래를 찾아 서너시간씩 연습했다.
개인적으로 남들앞에서 노래해 본 경험이 전무하다시피한 사람들이 모여, 화음을 갖춘 합창을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서너달 지속적으로 모이며 각자 열심히 노력한 결과가 서서히 나타날 즈음인 2014 년 3월, 김익중 교수의 탈핵강좌를 여는데 사전공연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노래하나 햇볕한줌' 의 데뷔무대가 된 이 공연 이후, 온 나라를 슬픔과 회한에 젖게만든 세월호 집회에서의 공연, 광주항쟁 기념 강좌 사전공연, 동학혁명 기념 행사 공연 등 크고 작은 다양한 공연들이 이어졌다.
실력보다는 희소성때문이었으리라 짐작되지만~^^
어쨌든 이렇게 많은 공연 일정을 소화하면서 우리의 실력도 조금씩 나아졌다.
한편, 상주라는 이 크지않은 도시에, 온갖형태의 아마추어 문화 예술 동아리들이 생겨나서,
함께 모여 한 판 흐드러진 '우리들만의 음악회'를 펼칠 수 있게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 마음 한켠에 지리하고 있었는데,
2014년 12월 26일 드디어 이 소망을 이루는 음악회가 열렸다